전투메카 자붕글이 보여준 천구백팔십이년의 파격적인 변신과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
기동전사 건담과 전설거신 이데온이라는 연이은 명작을 통해 우주적 규모의 비극과 인간 심리의 어두운 단면을 극도로 몰아붙였던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천구백팔십이년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신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일본 나고야 TV를 통해 첫 전파를 탄 전투메카 자붕글은 방영 초기부터 기존의 무거운 로봇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져 있던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습니다. 비극의 거장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서부극의 역동적인 분위기와 시트콤 같은 유쾌한 웃음 코드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완구 회사의 상업적 요구로 디자인된 로봇의 형태마저 극 중 인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소형차처럼 운전하거나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등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코믹하게 묘사하여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방영 당시 청소년층은 매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과 개성 넘치는 인물들의 만담에 열광했으며 이는 토미노 감독의 폭넓은 연출 스펙트럼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 작품은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가장 활기차고 매력적인 무대로 재창조한 시대를 앞서간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조라 행성의 삼일 규칙과 가솔린 냄새 풍기는 워커 머신의 거친 세계관
이야기의 무대는 지구라고 불리던 머나먼 미래의 행성 조라입니다. 이곳의 대지는 온통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황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류는 문명의 잔해 속에서 힘겹게 생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조라 행성에는 법률을 대신하는 삼일 규칙이라는 독특한 관습법이 존재합니다. 아무리 중대한 범죄나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도 사흘 동안 피해자의 추적을 피해 살아남는다면 모든 죄를 사면받고 완벽한 자유인이 된다는 황당하면서도 가혹한 규칙입니다. 이 무법천지의 세계에서 인류는 가솔린 엔진으로 구동되는 이족 보행 로봇인 워커 머신을 삶의 터전이자 무기로 삼아 살아갑니다. 거대한 바퀴가 달린 육상 전함인 아이언 기어가 대지를 누비고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광물인 블루 스톤을 채굴하기 위해 매일같이 치열한 이권 다툼을 벌입니다. 이러한 삭막한 환경 속에서 파란색 외형을 가진 최첨단 워커 머신 전투메카 자붕글의 등장은 행성의 운명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원수를 쫓는 소년 지론 아모스의 무모한 여정과 아이언 기어 동료들과의 만남
주인공 지론 아모스는 조라 행성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독특한 성격을 가진 소년입니다. 그는 부모님을 살해한 사막의 약탈자 티메프를 쫓고 있었는데 티메프는 이미 삼일 규칙을 적용받아 죄를 씻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지론 아모스는 행성의 오랜 관습법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사흘이 지나든 삼 년이 지나든 원수를 반드시 처단하겠다는 집념 하나로 추적을 멈추지 않습니다. 원수를 쫓는 여정 속에서 지론 아모스는 캐링 카고가 이끄는 대규모 상인 집단의 육상 전함 아이언 기어에 밀항하게 되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동료들을 만납니다. 캐링 카고의 딸이자 당찬 성격을 가진 엘치 카고와 그녀를 보좌하는 침착한 조종사 라그 우라로를 비롯한 개성파 인물들과 얽히게 됩니다. 지론 아모스는 특유의 엉뚱함과 뛰어난 행동력으로 아이언 기어의 핵심 전력이 되며 전함에 보관되어 있던 두 대의 전투메카 자붕글을 조종하여 사막의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동료들을 구해내기 시작합니다.
이노센트의 지배 체제와 조라 행성에 감춰진 인류 재생 계획의 진실
이야기가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지론 아모스와 아이언 기어 일행은 단순히 사막의 약탈자들과 싸우는 수준을 넘어 행성의 지배 계급인 이노센트의 실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노센트들은 쾌적한 돔 형태의 인공 도시 안에서 고도의 과학 문명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으며 황야의 주민들인 시빌리안들에게 블루 스톤을 대가로 워커 머신과 무기를 공급하며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빌리안들이 서로 싸우고 경쟁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하며 행성의 절대적인 신으로 군림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론 아모스가 삼일 규칙이라는 규율을 깨부수고 이노센트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하자 지배 체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노센트가 시빌리안들에게 가혹한 환경을 제공한 것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습니다. 과거 환경 오염으로 멸망해 가던 지구를 구하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하여 거친 황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인류를 문명화하는 인류 재생 계획을 수행 중이었던 것입니다. 지론 아모스는 바로 이노센트가 원했던 완벽하게 자립적인 인간의 표본이었지만 정작 지배층은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지론 아모스를 제거하려 듭니다.
(※ 아래 내용에는 전투메카 자붕글 애니메이션의 최종 결말과 관련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서 랭크의 희생과 이노센트 혁명파의 봉기로 타오르는 최종 전쟁
이노센트의 고위 지도자 중 한 명인 아서 랭크는 지론 아모스의 모습을 보며 시빌리안들이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조라 행성을 살아갈 능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합니다. 아서 랭크는 지배 계급의 특권을 내려놓고 시빌리안들과 손을 잡으려는 혁명파를 이끌게 되지만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 의장 카시 가와 군사 정권은 더욱 가혹한 탄압을 감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지론 아모스의 동료였던 엘치 카고가 이노센트 보수파에게 납치되어 세뇌를 당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엘치 카고는 기억을 잃은 채 강력한 신형 워커 머신을 이끌고 아군이었던 아이언 기어를 공격하는 적 지휘관으로 전장에 서게 됩니다. 지론 아모스는 세뇌된 엘치 카고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조라 행성의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흩어져 있던 시빌리안 세력을 하나로 모아 이노센트의 핵심 본거지인 포인트 엑스를 향해 대규모 진격을 개시합니다. 아서 랭크는 시빌리안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스스로를 희생하고 이 고결한 희생은 전장의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최종 결전의 막이 오릅니다.
지레의 파멸과 엘치 카고의 구출 그리고 황야에 피어난 새로운 시대의 결말
최종 결전의 무대인 포인트 엑스는 각 세력의 거대 육상 전함들과 수백 대의 워커 머신들이 뒤엉켜 치열한 포격을 주고받는 거대한 전장으로 변합니다. 지론 아모스는 전투메카 자붕글의 후속 기체인 워커 가리어를 타고 전장의 한복판을 돌파하며 카시 가의 군대를 압도합니다. 처절한 사투 끝에 지론 아모스는 마침내 엘치 카고의 세뇌를 풀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엘치 카고는 폭발의 여파로 시력을 잃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지배욕에 눈이 멀어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던 카시 가와 보수파 군대는 문명의 이기였던 돔 도시의 붕괴와 함께 허망하게 파멸을 맞이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노센트의 독점 체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과학 기술은 조라 행성의 모든 주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됩니다. 결말 부분에서 지론 아모스는 눈이 멀어 절망하고 있던 엘치 카고를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등에 업은 채 드넓은 황야를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갑니다. 아이언 기어의 모든 동료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며 이제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대지를 개척해 나갈 인류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며 작품은 유쾌하고 감동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전투메카 자붕글이 남긴 독창적인 가치와 현실적인 장단점 분석
전투메카 자붕글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어둡고 칙칙하게만 그리지 않고 서부극 특유의 활력과 활기찬 인간 군상의 모습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장점을 가진 작품입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워커 머신들은 세련된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산업 현장의 중장비처럼 투박하고 친근하게 묘사되어 기계적인 사실감을 더해줍니다. 주인공 지론 아모스가 보여주는 기존의 관습과 억압에 굴하지 않는 당찬 행보는 고등학생 독자들에게도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개그 기믹과 만담 형식을 너무 자주 차용하다 보니 서사의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고 진지한 주제 의식이 가벼워 보인다는 명확한 단점도 존재합니다. 후반부 이노센트와의 대립 과정에서 출생의 비밀이나 세계관의 진실이 밝혀지는 전개가 다소 급작스럽게 연출되어 이야기의 개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청자들에게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삼십 년이 넘은 고전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전투 장면의 프레임이 투박하고 일부 연출이 단조롭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부분입니다.
#전투메카자붕글 #토미노요시유키 #고전애니 #메카닉애니메이션 #애니리뷰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