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7월 18일 일본에서 개봉한 붉은 돼지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작 중 하나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깊은 통찰력과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1920년대 후반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은 당시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영향을 받아 미야자키 감독이 인간과 전쟁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아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는 일본항공 기내 상영을 위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기획되었으나 감독의 아이디어가 확장되면서 장편 극장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개봉 당시 일본에서는 47.6억 엔의 흥행 수익을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으며 국내에는 2003년 12월 19일에 개봉하여 뒤늦게 관객들을 만났습니다.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성인 관객에게 더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주제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의 상흔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깊이 있는 메시지는 많은 이들에게 여운을 남겼습니다. 특히 하늘을 나는 비행정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비행 장면들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극찬을 받았습니다.
전설적인 파일럿 포르코 로소의 탄생
붉은 돼지의 주인공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이탈리아 공군 에이스 마르코 파곳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허무함과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마법에 걸려 돼지의 모습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포르코 로소 이탈리아어로 붉은 돼지 로 바꾸고 아드리아해의 작은 무인도에 은신처를 마련하여 살아갑니다. 그는 더 이상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고 하늘의 해적 즉 공적들을 소탕하는 현상금 사냥꾼으로 살아가며 돈을 벌어 생활합니다.
포르코는 인간의 탐욕과 전쟁의 광기 속에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 돼지가 되는 길을 택한 아이러니한 인물입니다. 그는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마음속 깊이 우정과 사랑 그리고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낭만주의자입니다. 그의 삶은 고독하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아드리아해는 그의 삶의 터전이자 자유를 만끽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고독을 품고 살아가는 그의 내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여름 휴양객들을 위협하는 공적들을 물리치면서 시작됩니다. 포르코는 공적들을 쉽게 제압하며 뛰어난 비행 실력을 뽐냅니다. 그는 현상금으로 돈을 벌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의 친구이자 동료들이었던 이탈리아 공군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경멸과 동시에 연민을 느낍니다.
라이벌 커티스와 운명적인 만남
어느 날 포르코의 라이벌로 미국인 비행사 커티스가 등장합니다. 커티스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비행 실력을 겸비한 인물로 지중해의 비행사들 사이에서 빠르게 명성을 얻습니다. 그는 포르코가 자주 드나드는 호텔 아드리아노의 여주인 지나를 흠모하고 그녀에게 청혼하지만 지나는 여전히 과거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포르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나는 포르코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가 인간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고 믿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커티스는 포르코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그를 공중전에서 꺾으려 합니다. 결국 포르코의 비행정이 정비 문제로 밀라노로 향하던 중 커티스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됩니다. 포르코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비행기는 대파되고 추락합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포르코는 자신의 비행정을 수리하기 위해 오랜 친구이자 비행정 제작자인 피콜로를 찾아 밀라노로 향합니다.
소녀 피오의 등장과 새로운 도전
밀라노에 도착한 포르코는 피콜로의 작업장에서 그의 손녀이자 비행기 설계자인 17살 소녀 피오를 만납니다. 피오는 포르코의 비행정을 보고 감탄하며 자신이 직접 수리하겠다고 자청합니다. 처음에는 소녀의 실력을 믿지 못했던 포르코는 피오의 열정과 재능에 점차 마음을 열게 됩니다. 피오는 포르코의 비행정을 개조하고 성능을 향상시키며 뛰어난 기술력을 선보입니다. 피오의 존재는 포르코의 메마른 감성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녀는 포르코가 돼지라는 사실에 전혀 거리낌 없이 대하며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합니다.
이탈리아는 파시즘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파시스트 정부는 현상금 사냥꾼인 포르코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그의 뒤를 쫓습니다. 포르코와 피오는 비행정을 수리하는 동안에도 정부의 감시를 피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피오의 도움으로 비행정은 완벽하게 수리되지만 포르코는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홀로 떠나려 합니다. 하지만 피오는 자신도 비행정에 탑승하여 포르코의 조력자가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녀는 포르코를 지키기 위해 그의 옆에 남겠다고 고집하고 결국 포르코는 피오와 함께 다시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커티스와의 최후의 대결 그리고 진정한 자유
피오와 함께 아드리아해로 돌아온 포르코는 커티스와의 재대결을 준비합니다. 커티스는 피오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녀를 얻기 위해 포르코와의 결혼을 제안하며 공중전을 신청합니다. 피오는 이를 받아들이고 포르코는 자신의 명예와 피오의 자유를 걸고 커티스와의 마지막 대결에 나섭니다.
스포일러 주의:
최후의 공중전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펼쳐집니다. 두 비행사는 서로의 모든 기술과 전략을 동원하여 승부를 겨룹니다. 비행기가 파손될 정도로 격렬한 싸움 끝에 결국 두 사람은 바다에 불시착하고 맨몸으로 주먹싸움을 벌입니다. 이 치열한 육탄전 끝에 포르코가 승리합니다. 승리한 포르코에게 피오는 키스를 합니다. 이 키스는 포르코에게 걸린 돼지 마법을 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때 이탈리아 공군이 현장에 들이닥치고 포르코는 체포될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지나가 나타나 포르코와 피오 그리고 커티스를 돕습니다. 지나는 이탈리아 공군에게 현상금 사냥꾼들을 체포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라고 설득하고 그들을 놓아줄 것을 요구합니다. 공군 지휘관은 지나의 설득에 마지못해 물러나고 포르코 일행은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후 포르코가 돼지의 모습을 완전히 벗고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암시가 나옵니다. 직접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커티스가 포르코의 얼굴을 보고 놀라 그를 쫓아가는 장면 그리고 지나의 호텔에 포르코의 비행정이 놓여 있는 모습 등 간접적인 연출을 통해 인간으로 돌아온 포르코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피오는 엔딩에서 훌륭한 비행기 제작자가 되어 자신의 항공사를 차리게 됩니다. 포르코는 여전히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독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와 삶의 의미를 깨닫고 지나와 피오 그리고 하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갑니다.
붉은 돼지가 전하는 시대와 인간에 대한 메시지
붉은 돼지는 단순히 돼지로 변한 파일럿의 모험담을 넘어선 깊은 의미를 지닌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전쟁에 대한 비판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아낸 수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포르코가 돼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은 인간 세상의 추악함 즉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감독의 강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가 되는 게 낫다"는 포르코의 대사는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관통합니다.
시각적으로는 미야자키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작화와 섬세한 배경 묘사가 돋보입니다. 특히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그 위를 수놓는 비행정들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비행 장면들은 현실적인 고증과 환상적인 상상력이 결합되어 보는 이들에게 짜릿한 쾌감과 동시에 평화로운 감성을 선사합니다. 히사이시 조의 아름다운 음악 또한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다가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관객들에게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쟁의 잔혹함과 파시즘에 대한 풍자는 어린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깊이가 있는 주제일 수 있습니다. 또한 영화의 초반 전개가 다소 느리다는 평도 있으며 포르코의 돼지 모습이 마법으로 풀리는 과정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아 아쉽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몇몇 캐릭터들의 비중이 적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유와 사랑 명예 그리고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하늘을 동경하고 자유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붉은 돼지는 오랜 여운을 남길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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