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20주년 기념작, 우리가 알던 루피가 아니다? 평행세계에서 펼쳐지는 거프와 루피의 충격적인 관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만화 원피스가 연재 20주년을 맞이하여 팬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바로 오다 에이치로 작가가 원피스를 정식 연재하기 전에 그렸던 단편 만화 '로맨스 던(Romance Dawn)'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2019년 10월 20일, TV 애니메이션 907화로 방영된 이 에피소드는 기존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군 영웅 거프가 해적으로 등장하고 루피의 밀짚모자가 샹크스가 아닌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설정은 원작의 근간을 뒤흔드는 흥미로운 요소였습니다. 단순히 과거의 단편을 영상화한 것을 넘어 원피스라는 거대한 세계관이 탄생하기까지 작가가 어떤 고민을 거쳤는지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와노쿠니 편의 화려한 색감과 연출이 더해져 더욱 생동감 넘치는 화면으로 재탄생한 루피의 또 다른 시작을 지금부터 자세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피스메인과 모가니아, 원피스의 원형이 되는 두 가지 해적의 정의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설정은 바로 해적에 대한 두 가지 분류입니다. 우리가 아는 원피스 본편에서는 해적을 하나로 퉁쳐서 정부에 반기를 드는 무법자로 규정하지만 로맨스 던의 세계관에서는 해적을 명확하게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약탈과 살인을 일삼으며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전형적인 악당 '모가니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험을 동경하고 바다를 사랑하며 악질적인 모가니아들을 소탕하는 정의로운 해적 '피스메인'입니다.
주인공 루피는 바로 이 '피스메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본편의 루피가 "나는 해적왕이 될 거야!"라고 외치며 자유를 갈망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도덕적인 영웅상이 가미된 느낌을 줍니다. 이는 오다 에이치로 작가가 초기 구상 단계에서 해적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낭만적으로 그려낼지 고민했던 흔적입니다. 루피의 성격은 여전히 긍정적이고 먹성을 밝히는 천진난만한 소년이지만 해적이 되는 동기와 목표가 '모험' 자체보다는 '나쁜 해적을 잡는 착한 해적'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할아버지가 해적? 거프와 앤 그리고 슈피엘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들
이번 에피소드에서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단연 몽키 D. 거프의 설정입니다. 본편에서는 해군의 전설이자 루피를 훌륭한 해병으로 키우려 했던 엄격한 할아버지였지만 이곳에서는 콧수염을 기르고 호탕하게 웃는 베테랑 해적으로 등장합니다. 심지어 루피의 트레이드 마크인 밀짚모자 역시 샹크스가 아닌 거프가 쓰고 다니다가 루피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루피가 해적의 꿈을 키우게 된 계기 또한 샹크스와의 만남이 아닌 할아버지 거프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는 설정은 팬들에게 묘한 배덕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또한 나미의 초기 디자인으로 추정되는 파란 머리의 소녀 '앤'이 히로인으로 등장합니다. 앤은 괴조 '발룬'과 함께 다니며 슈피엘이라는 악당 해적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그녀는 훗날 나미의 외형과 성격에 큰 영향을 준 캐릭터로 당차고 의리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협하는 악당 슈피엘은 육각형 마법? 혹은 기술을 사용하는 독특한 해적으로 전형적인 '모가니아'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비열하고 잔인하며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경시하는 모습은 루피가 물리쳐야 할 절대악으로 기능합니다.
바다를 표류하는 소년과 파란 머리 소녀의 운명적인 만남
이야기는 망망대해 위 작은 쪽배에서 배고픔에 허덕이는 루피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본편 1화의 술통 표류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 장면은 루피라는 캐릭터의 생존력과 낙천적인 성격을 단번에 보여줍니다. 우연히 거대한 해적선의 냄새를 맡고 접근한 루피는 그곳에서 슈피엘 일당에게 붙잡혀 있는 소녀 앤과 거대한 새 발룬을 목격하게 됩니다. 정의감 넘치는 루피는 특유의 엉뚱함으로 배에 침입하여 앤을 구출해 내고 작은 마을로 도망치게 됩니다.
마을에서 앤은 루피에게 자신의 친구인 발룬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발룬은 전설 속의 괴조 '로크'의 피를 이어받은 새로 앤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슈피엘은 발룬의 희귀성을 노리고 그들을 끈질기게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루피의 과거 회상이 오버랩됩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거프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해적이 되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루피의 모습이 나옵니다. 거프는 보물 상자 안에 든 악마의 열매를 보여주며 이것의 가치를 설명하지만 배가 고팠던 루피는 그것을 디저트인 줄 알고 꿀꺽 삼켜버립니다. 본편과 달리 샹크스의 팔이 잘리는 비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거프가 루피에게 해적의 길(피스메인)을 알려주고 밀짚모자를 씌워주는 장면은 샹크스와의 이별 장면만큼이나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슈피엘은 앤과 루피가 숨어 있는 마을을 찾아내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합니다. 슈피엘은 전형적인 비겁한 악당답게 마을 사람들의 안전을 볼모로 잡고 앤에게 발룬을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앤은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룬과 함께 슈피엘에게 잡혀가는 선택을 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루피는 분노하며 슈피엘의 배로 향합니다. 하지만 슈피엘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발룬을 학대하고 앤을 조롱하며 모가니아로서의 추악한 본성을 드러냅니다. 루피는 고무고무 능력을 사용하여 배에 올라타지만 슈피엘의 교묘한 함정과 육각형 공격에 고전하며 쓰러지게 됩니다.
※ 아래 내용에는 원피스 로맨스 던 애니메이션의 결말과 관련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작품을 감상하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 바랍니다.
해적의 긍지를 건 마지막 일격과 새로운 모험의 시작
쓰러진 루피를 보며 슈피엘은 비웃음을 날립니다. 해적이란 원래 약탈하고 빼앗는 존재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그때 루피가 다시 일어섭니다. 루피는 "그건 해적이 아니야! 해적은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는 거야!"라고 일갈하며 진정한 피스메인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슈피엘은 자신의 마법 지팡이?를 이용해 루피를 공격하지만 이미 분노가 정점에 달한 루피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루피는 앤과 발룬을 상처 입힌 것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하며 기어를 올립니다.
슈피엘이 발룬의 날개를 꺾으려 하자 루피의 주먹이 불을 뿜습니다. "내 친구를 건드리는 녀석은 용서 못 해!"라는 대사와 함께 루피의 시그니처 기술인 '고무고무 총(피스톨)'이 작렬합니다. 이때의 연출은 와노쿠니 편의 작화 감독이 참여한 만큼 역동적이고 타격감이 넘칩니다. 루피의 주먹은 슈피엘의 육각형 방어막을 뚫고 그의 얼굴에 정통으로 꽂힙니다. 슈피엘은 저 멀리 하늘의 별이 되어 날아가 버리고 배는 루피의 힘에 의해 반파됩니다.
싸움이 끝난 후 앤은 루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발룬 역시 루피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며 따릅니다. 루피는 앤에게 함께 모험을 떠나자고 제안할 법도 하지만 앤은 마을에 남아 발룬을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루피는 쿨하게 작별을 고하고 다시 자신의 쪽배에 몸을 싣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멀리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거프의 배가 등장합니다. 거프는 망원경으로 훌륭하게 성장한 손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호탕하게 웃습니다. "제법이구나, 루피! 훌륭한 피스메인이 되어라!"라는 거프의 독백과 함께 루피의 쪽배가 끝없는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희망차게 마무리됩니다.
팬들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 하지만 본편과는 확연히 다른 맛에 대한 호불호
원피스 20주년 기념 에피소드 '로맨스 던'은 원피스라는 거대한 전설의 시작점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 '신선함'입니다. 20년 넘게 고착화된 캐릭터들의 관계와 설정을 비틀어 보여줌으로써 팬들에게 "만약에?"라는 상상력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특히 해군 영웅 거프가 자유로운 영혼의 해적으로 등장해 루피를 이끌어준다는 설정은 본편의 비극적인 정상전쟁 등을 떠올려봤을 때 묘한 카타르시스와 힐링을 선사합니다. 또한 와노쿠니 편 제작진이 참여한 만큼 작화 퀄리티가 상당히 높으며 액션 신의 타격감이나 색감 활용이 뛰어납니다. 성우진 역시 기존 원피스 성우들이 그대로 참여하여 연기의 위화감 없이 평행세계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 존재합니다. 단편 만화를 원작으로 하다 보니 20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 모든 서사를 담아내기에 급급한 느낌이 듭니다. 악당 슈피엘의 서사가 너무 빈약하고 전형적이라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또한 본편의 방대한 세계관에 익숙해진 팬들에게는 '피스메인'이나 '모가니아' 같은 설정이 다소 유치하거나 낯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루피가 동료를 모으는 과정 없이 혼자서 사건을 해결하고 떠나는 결말은 깔끔하지만 밀짚모자 일당의 케미를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원피스 팬이라면 반드시 챙겨봐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오다 에이치로가 꿈꾸었던 초기 원피스의 형태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루피가 있기까지 어떤 설정들이 더해지고 빠졌는지를 비교하며 감상한다면 원피스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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