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 아리에티, 지브리가 선사하는 가장 작고 아름다운 판타지의 세계와 감동적인 여정

 


2010년 개봉 당시 지브리의 세대교체를 알리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수작

2010년 여름 극장가를 찾아온 마루 밑 아리에티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기획과 각본을 맡고 당시 신예였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가 감독 데뷔를 알린 작품입니다 영국의 동화작가 메리 노튼의 판타지 소설 마루 밑의 시계종족을 원작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은 개봉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지브리 특유의 섬세한 작화와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일본 내에서만 92억 엔이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인간의 시선이 아닌 10cm 남짓한 소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의 묘사는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빗방울이 거대한 물폭탄처럼 느껴지고 평범한 정원이 울창한 정글처럼 다가오는 시각적 체험은 애니메이션만이 줄 수 있는 최고의 판타지를 선사했습니다 또한 프랑스 가수 세실 코르벨이 담당한 켈틱 풍의 신비로운 OST는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며 많은 이들의 인생 OST로 자리 잡았습니다

멸망해가는 종족의 운명을 짊어진 소녀와 죽음을 앞둔 소년의 만남

이야기의 배경은 도쿄 외곽에 위치한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저택입니다 이곳에는 심장병 수술을 일주일 앞두고 요양을 위해 내려온 인간 소년 쇼우가 머물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이혼과 바쁜 일상으로 인해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쇼우는 자신의 병약한 몸 상태만큼이나 마음 또한 공허하고 외로운 상태입니다 그는 세상에 대해 별다른 애착이 없으며 다가올 수술 또한 체념한 듯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쇼우가 머무는 저택의 마루 밑에는 인간들의 물건을 몰래 빌려 쓰며 살아가는 소인 가족이 숨어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포드와 어머니 호밀리 그리고 호기심 많은 14살 소녀 아리에티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인간들에게 들키면 이사를 가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덩치는 작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꾸려가는 이들은 인간들이 흘린 각설탕 하나가 일주일치 식량이 되고 핀 하나가 훌륭한 검이 되는 독특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리에티는 이제 막 14살이 되어 아버지로부터 물건 빌리기를 배울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과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빨래집게로 머리를 묶고 붉은 원피스를 입은 채 정원을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어느 날 아리에티는 월계수 잎을 구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쇼우와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인간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어긴 셈이지만 쇼우는 그녀를 해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못 본 척해 줍니다 이 짧은 만남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의 거대함 속에서 펼쳐지는 아리에티 가족의 위태롭고 경이로운 일상

※ 아래 내용에는 마루 밑 아리에티의 결말과 관련된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 바랍니다

아리에티는 아버지 포드와 함께 생애 첫 물건 빌리기에 나섭니다 그들의 목표는 각설탕 하나와 티슈 한 장입니다 인간들에게는 하찮은 물건이지만 소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자 거대한 전리품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벽 안쪽의 좁은 통로를 지나고 못을 박아 만든 계단을 오르며 주방으로 향하는 여정은 마치 암벽 등반을 하는 듯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쥐나 바퀴벌레 같은 생물들이 이들에게는 거대한 괴수와 같기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주방에 도착한 아리에티는 아버지의 능숙한 솜씨를 보며 각설탕을 무사히 확보합니다 다음 목표인 티슈를 뽑으려던 순간 잠이 든 줄 알았던 쇼우가 눈을 뜨고 아리에티를 바라보며 말을 건넵니다 너무 놀란 아리에티는 실수로 각설탕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아버지는 서둘러 아리에티를 데리고 마루 밑으로 도망치지만 아리에티의 마음속에는 아쉬움과 함께 쇼우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싹틉니다

다음 날 쇼우는 아리에티가 떨어뜨린 각설탕을 잃어버린 물건이라며 마루 밑 통풍구 앞에 놓아둡니다 그리고 작은 편지를 함께 남깁니다 하지만 아리에티의 아버지는 이것이 인간의 함정일 수 있다며 경계합니다 아리에티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 몰래 각설탕을 쇼우에게 돌려주러 갑니다 쇼우의 방 창가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된 아리에티는 인간들이 자신들을 멸종 위기 종이라 생각한다는 사실에 발끈하며 우리 종족은 건재하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 순간 까마귀가 아리에티를 공격하려 하고 쇼우가 그녀를 구해줍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지만 저택의 가정부인 하루가 이들의 존재를 눈치채기 시작합니다 탐욕스럽고 의심 많은 하루는 예전부터 소인들이 산다는 전설을 믿고 있었고 그들을 잡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합니다 쇼우는 아리에티 가족을 돕고 싶은 마음에 증조할아버지가 소인들을 위해 만들어둔 정교한 인형의 집 부엌을 떼어내 마루 밑 아리에티의 집에 선물합니다 하지만 이 선의는 오히려 재앙이 됩니다 갑작스럽게 천장이 뜯겨나가고 거대한 주방이 들어오는 상황은 아리에티 가족에게 지진과 같은 공포였으며 집이 노출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아리에티 가족은 정들었던 집을 떠나 이사를 결심합니다 포드가 새로운 거처를 알아보러 간 사이 하루가 마루 밑을 급습합니다 하루는 아리에티의 어머니 호밀리를 납치하여 병에 가두고 창고에 숨겨버립니다 그리고 소인 구제 업체를 부를 계획을 세웁니다 외출했다 돌아온 아리에티는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알고 절망하지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인간인 쇼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심장이 약해 뛰는 것조차 힘겨운 쇼우지만 아리에티를 위해 용기를 냅니다 쇼우는 아리에티를 어깨에 태우고 어머니가 갇힌 곳을 찾아냅니다 쇼우가 하루의 시선을 끄는 사이 아리에티는 기지를 발휘해 어머니를 구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쇼우와 아리에티는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아리에티는 쇼우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주었고 쇼우는 아리에티 가족을 지켜주었습니다

모든 사건이 끝나고 아리에티 가족은 야생에서 살아가는 소인 스필러의 도움을 받아 강을 따라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로 합니다 새벽녘 강가에서 쇼우는 아리에티를 배웅하러 나옵니다 둘은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너는 내 심장의 일부라며 덕분에 살고 싶은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리에티는 쇼우의 손가락을 감싸 안으며 자신의 머리 집게를 선물로 건넵니다 주전자를 개조한 배를 타고 멀어지는 아리에티를 바라보며 쇼우는 다가올 수술을 이겨내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아리에티 역시 새로운 세상으로의 힘찬 항해를 시작하며 영화는 긴 여운을 남기고 막을 내립니다

극강의 비주얼과 사운드가 빚어낸 황홀경 그러나 다소 밋밋한 서사

마루 밑 아리에티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 중에서도 배경 작화만큼은 최고 수준이라 평가받을 만합니다 소인의 시점에서 묘사된 일상적인 사물들의 디테일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먼지 하나 물방울 하나의 질감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여 관객이 마치 소인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등 사운드 디자인 또한 ASMR을 듣는 듯 정교하여 시청각적인 쾌감을 극대화합니다 특히 세실 코르벨의 하프 연주와 몽환적인 목소리는 영화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 전개 측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입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거대한 스케일과 역동적인 모험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다소 심심하고 정적인 영화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큰 갈등 구조가 가정부 하루와의 숨바꼭질 정도에 그치며 클라이맥스 부분의 긴장감이 다른 지브리 작품들에 비해 약하다는 평이 있습니다 멸종 위기의 소인족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간의 탐욕과 자연의 섭리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지만 그 깊이가 다소 얕게 느껴진다는 지적도 존재합니다

쇼우와 아리에티의 로맨스 라인도 명확한 사랑보다는 깊은 우정과 연민 사이에 머물러 있어 로맨스를 기대한 팬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가정부 하루의 행동이 다소 과장되고 개연성이 부족하여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그녀가 왜 그토록 소인들을 잡으려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단순한 악역으로만 소비된 점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주는 잔잔한 감동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자극적인 소재 없이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으며 바쁜 현대인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의 작은 것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여유를 선물합니다

잊고 지냈던 순수함을 일깨우는 작지만 위대한 걸작

마루 밑 아리에티는 우리 곁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비록 화려한 마법이나 전투는 없지만 소인들의 치열한 생존기와 종족을 뛰어넘은 교감은 그 자체로 충분히 극적입니다 쇼우가 아리에티를 통해 삶의 의지를 되찾았듯 우리 역시 이 영화를 통해 팍팍한 현실을 살아갈 작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지브리 특유의 따뜻한 감성과 아날로그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이 영화는 종합 선물 세트와도 같습니다 비 오는 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감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작품입니다 마루 밑 작은 세상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동심을 다시금 두드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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