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식을 참으려고 애쓰던 밤이었습니다. 가볍게 볼 만한 이세계물이나 찾아볼까 하고 튼 애니메이션이 하필 터무니없는 스킬로 이세계 방랑밥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날 밤 배달앱을 켤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려한 전투나 복잡한 세계관 대신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장면만으로 이렇게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신선했습니다. 이번에는 이 작품을 다시 정주행하며 왜 이 애니메이션이 밥 테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지 그리고 단순한 먹방을 넘어선 매력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인터넷 슈퍼라는 볼품없는 스킬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터무니없는 스킬로 이세계 방랑밥의 주인공 무코다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용사 소환에 휘말려 이세계로 떨어집니다. 진짜 용사로 소환된 사람들은 화려한 전투 스킬을 얻지만 무코다가 받은 능력은 그저 인터넷 슈퍼라는 볼품없는 스킬뿐입니다. 현대의 마트에서 식재료와 조미료를 주문해 받을 수 있는 것이 전부인 이 스킬은 얼핏 쓸모없어 보이지만 이세계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 할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야기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무코다가 우연히 만든 돼지고기 생강구이 냄새에 이끌려 전설의 마수 펜리르가 찾아오면서부터입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펜리르는 무코다의 요리 맛에 완전히 매료되어 강제로 종마 계약을 맺게 되고 이름을 페르라고 지어줍니다. 이후 회복 능력을 가진 슬라임 스이까지 합류하면서 무코다 일행은 인간 세상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들과 함께 여행하는 기묘한 조합을 이루게 됩니다.
이 작품의 매력은 이렇게 압도적인 힘을 가진 종마들이 오직 밥 때문에 무코다를 따른다는 설정에서 나옵니다.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존재가 카라아게 한 접시에 행복해하는 모습은 단순하지만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전투나 던전 공략도 물론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다음 요리를 위한 재료 수급 과정 정도로 가볍게 다뤄지고 진짜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무코다가 부엌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는 순간입니다. 화려한 액션 대신 잔잔한 일상과 식사 장면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무코다와 페르 스이가 만들어내는 케미스트리
이 작품의 성우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무코다 역의 호소야 요시마사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인물이 이세계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합니다. 특히 요리를 하는 장면에서 들려주는 나긋한 설명 톤은 시청자에게 마치 옆에서 요리 과정을 지켜보는 듯한 편안함을 줍니다. 실제로 이 성우는 극중 요리를 직접 조리해 공개하는 영상까지 선보일 정도로 캐릭터에 애정을 쏟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런 진심이 연기에도 묻어난다고 느꼈습니다.
페르 역의 스기타 토모카즈는 전설의 마수라는 위압적인 존재를 연기하면서도 밥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지는 허당스러움을 절묘하게 넘나듭니다.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위협적인 대사를 내뱉다가도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어딘가 들뜨는 미묘한 톤 변화가 이 캐릭터의 코믹함을 극대화시킵니다. 스이 역의 쿠노 미사키는 슬라임이라는 비인간적인 존재에게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불어넣었는데 짧고 통통 튀는 말투로 캐릭터의 귀여움을 잘 살려냈습니다. 세 배우의 합이 워낙 좋아서 일행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훈훈한 분위기가 전해집니다.
힐링과 단조로움 사이에서
장점을 먼저 이야기하면 요리 장면의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실제 조리 과정을 트레이스해서 제작했다는 이야기답게 재료를 써는 소리부터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까지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보는 내내 군침이 돌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강력한 존재들이 밥 때문에 무코다를 따른다는 설정 덕분에 큰 갈등 없이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힐링 애니메이션으로서의 매력이 확실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야기 구조가 대체로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고 재료를 구하고 요리를 하는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회차가 쌓일수록 전개가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서사적 긴장감이나 큰 사건을 기대하고 본다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실제 브랜드 조미료와 식품이 자주 등장하는 연출은 몰입을 방해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리얼리티를 살리는 요소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투 장면의 비중이 낮고 작화 역시 요리 장면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액션을 기대하는 시청자에게는 아쉬울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결말이 궁금하지 않은 분들은 여기서 읽기를 멈추시길 권합니다.
여신의 가호를 얻고 계속되는 방랑의 여정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무코다는 바람의 여신 닌릴에게 정기적으로 이세계에는 없는 단 음식을 바치게 되고 그 대가로 여신의 가호라는 스킬을 얻게 됩니다. 이 스킬을 통해 무코다는 인터넷 슈퍼에서 더 다양한 물건을 저렴하게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여정의 폭이 한층 넓어집니다. 애니메이션 1기와 2기는 원작의 큰 사건을 마무리 짓기보다는 무코다 일행이 새로운 동료와 인연을 계속 늘려가는 과정을 그리며 끝을 맺습니다.
특히 2기에서는 하이엘프 무리가 인간의 요리에 낚여 무코다 저택의 전속 해체업자로 합류하는 등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동료 관계가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무코다는 여전히 평범한 회사원의 마인드를 유지한 채로 압도적인 존재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없이 요리를 하며 살아가는데 이 온도차가 만들어내는 유쾌함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매력입니다. 명확한 최종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인연이 쌓이고 식탁이 넓어지는 과정 자체가 결말처럼 느껴지는 구성이라 오히려 부담 없이 계속 볼 수 있었습니다.
터무니없는 스킬로 이세계 방랑밥은 거창한 서사 대신 따뜻한 밥 한 끼가 주는 위로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었습니다. 반복되는 전개에 아쉬움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음 화를 누르게 만드는 힘만큼은 확실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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