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려고 봤다가 울고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한 화에서는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다가 다음 화에서는 눈물을 쏟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바로 은혼입니다. 은혼은 소라치 히데아키가 2003년부터 2019년까지 연재한 만화이며 2006년부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오랫동안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은혼을 처음 보려는 사람들은 종종 벽에 부딪힙니다. 사무라이가 나오는데 외계인도 나오고 에도 시대 같은데 우주선이 날아다닙니다. 게다가 에피소드가 수백 편이라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막막합니다. 하지만 은혼의 세계관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의외로 이야기의 뼈대는 단순합니다. 모든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외계인과 그들에 맞서 싸운 사무라이들 그리고 한 스승과 세 제자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은 은혼 세계관 연표를 처음 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무라이와 외계인이 함께 사는 에도 은혼은 어떤 세계일까
은혼의 무대는 에도 시대 말기를 닮은 가상의 일본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에도 시대 말기에는 서양의 배가 일본에 들어와 나라를 강제로 열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은혼은 이 역사를 비틀어 서양 배 대신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 일본에 내려왔다는 설정을 만들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이 외계인들을 천인이라고 부릅니다.
천인이 내려온 뒤 에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늘에는 우주선이 떠다니고 거리에는 고양이 얼굴이나 개 얼굴을 한 외계인들이 평범하게 걸어 다닙니다. 에도 한가운데에는 우주로 오가는 거대한 터미널이 세워졌습니다. 겉모습은 에도 시대지만 텔레비전과 스쿠터 그리고 편의점까지 있는 묘한 세상입니다.
은혼의 재미는 바로 이 어색한 조합에서 나옵니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이야기에 공상 과학과 현대 일본의 모습을 뒤섞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든 자연스럽게 펼쳐질 수 있습니다. 사극이 되었다가 공상 과학 모험이 되었다가 다른 만화를 대놓고 패러디하는 개그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혼 팬들은 은혼을 장르가 은혼인 작품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천인 습래와 양이전쟁 긴토키의 잃어버린 과거
은혼 세계관 연표의 출발점은 본편보다 약 20년 전 천인이 에도에 처음 내려온 사건입니다. 이를 천인 습래라고 부릅니다. 강력한 기술력을 가진 천인들은 막부를 압박해 나라를 열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사무라이들은 천인을 몰아내기 위해 칼을 들었는데 이 전쟁이 바로 양이전쟁입니다.
양이전쟁 이야기의 중심에는 요시다 쇼요라는 스승이 있습니다. 쇼요는 시골에서 작은 서당을 열어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 세 명이 훗날 은혼의 핵심 인물이 됩니다. 바로 주인공 사카타 긴토키와 카츠라 코타로 그리고 타카스기 신스케입니다. 전쟁터에서 시체의 물건을 뒤지며 살던 어린 긴토키를 거둔 사람도 쇼요였습니다.
그런데 쇼요는 막부에 의해 붙잡혀 끌려갑니다. 세 제자는 스승을 되찾기 위해 양이전쟁에 뛰어들었고 사카모토 타츠마까지 합류해 전장을 누볐습니다. 이때 긴토키는 전장의 귀신이라는 뜻의 백야차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막부는 결국 천인에게 굴복했고 양이전쟁은 사무라이들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이후 막부는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폐도령을 내리며 사무라이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스승 쇼요 역시 제자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의 상처는 세 제자에게 각각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만듭니다.
가부키초 해결사 시대와 은혼 본편의 시작
은혼 본편은 양이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백야차로 불리던 긴토키는 이제 에도의 유흥가 가부키초에서 무엇이든 해 주는 해결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은색 곱슬머리이고 딸기 우유를 좋아하며 늘 집세를 밀리는 게으른 모습이지만 소중한 사람을 지킬 때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사무라이로 돌아갑니다.
해결사에는 두 명의 동료가 함께합니다. 무너진 검술 도장을 지키려는 평범한 안경 소년 시무라 신파치와 우주 최강의 전투 종족 야토족 출신 소녀 카구라입니다. 여기에 거대한 흰 개 사다하루까지 더해져 해결사 가족이 완성됩니다. 은혼 초반은 이들이 에도의 온갖 기상천외한 의뢰를 해결하는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전쟁이 끝난 뒤 옛 동료들도 저마다 다른 길을 걷습니다. 카츠라는 여전히 막부를 무너뜨리려 하지만 무차별 폭력 대신 온건한 방법을 고집하는 양이지사가 되었습니다. 반면 타카스기는 과격한 무장 집단 귀병대를 이끌며 세상을 모두 부수겠다는 뜻을 품습니다. 사카모토는 우주를 오가는 무역 회사를 차려 상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을 쫓는 쪽에는 막부의 경찰 조직 진선조가 있습니다. 국장 콘도와 부장 히지카타 그리고 천재 검사 오키타는 긴토키와 티격태격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함께 칼을 드는 사이가 됩니다.
코믹 속에 숨은 거대한 음모 장편 에피소드의 흐름
은혼은 개그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진지한 장편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이 장편들을 따라가면 세계관의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타카스기와 긴토키 일행이 처음으로 정면 충돌하는 홍앵편에서는 옛 동료가 적이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요시와라 염상편에서는 우주 해적단 하루사메가 등장하고 카구라의 오빠 카무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이야기의 무대가 우주로 넓어집니다.
세계관의 비밀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장군 암살편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긴토키가 숨겨 온 가장 아픈 과거가 밝혀집니다. 막부에 붙잡힌 쇼요를 구하려던 긴토키는 스승과 동료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잔인한 요구를 받았습니다. 긴토키는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손으로 스승 쇼요의 목을 베었습니다. 타카스기가 긴토키를 증오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뒤이어 낙양결전편에서는 더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납니다. 쇼요는 사실 죽지 않는 존재 우츠로의 수많은 인격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우츠로는 행성의 생명 에너지인 알타나의 영향으로 수백 년 동안 죽지 못한 채 살아온 존재입니다. 끝없는 삶에 지친 우츠로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천인과 막부를 뒤에서 조종하며 세상의 비극을 만들어 왔습니다. 쇼요가 제자들에게 주었던 따뜻함과 우츠로의 끝없는 절망이 한 몸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스포일러 주의 은혼편과 최종 결말
지금부터는 은혼 최종장의 결말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작품을 끝까지 보지 않으셨다면 이 부분은 건너뛰시기를 권합니다.
은혼의 마지막 이야기인 은혼편에서 우츠로는 천인 연합군을 이끌고 지구를 공격합니다. 그의 목표는 우주 전체를 휘말리게 하는 전쟁을 일으켜 지구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자신도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긴토키와 해결사는 물론 진선조와 카츠라 그리고 타카스기의 귀병대와 사카모토까지 지금까지 등장한 거의 모든 인물이 힘을 합칩니다. 오랫동안 등을 돌렸던 긴토키와 타카스기도 이 싸움에서 다시 나란히 칼을 듭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야기는 2년 뒤로 건너뜁니다. 에도는 다시 세워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해결사는 흩어졌고 긴토키는 모습을 감춘 상태였습니다. 우츠로의 힘을 이용해 불사를 얻으려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면서 흩어졌던 동료들은 다시 모이게 됩니다.
최종 결말은 2021년 1월 개봉한 극장판 은혼 더 파이널에서 그려졌습니다. 우츠로는 타카스기의 몸을 빼앗아 되살아나려 하고 긴토키는 마지막으로 우츠로와 맞섭니다. 타카스기는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우츠로를 스스로 찌르고 긴토키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면서 우츠로는 마침내 죽음을 맞습니다. 인간의 몸에 들어가 더는 불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타카스기는 긴토키의 품에서 이번에도 긴토키가 이겼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둡니다. 쇼요 역시 몸속의 알타나를 이용해 터미널의 폭발을 막고 사라집니다. 모든 싸움이 끝난 뒤 긴토키는 해결사로 돌아오고 신파치와 카구라와 함께 다시 새로운 의뢰를 향해 달려 나가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은혼을 살아 숨 쉬게 만든 성우들의 연기
은혼이 이렇게 오래 사랑받은 데에는 성우들의 공도 큽니다. 긴토키 역의 스기타 토모카즈는 은혼 그 자체라고 불릴 만큼 캐릭터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나른하고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웃음을 주다가 스승과 동료를 이야기할 때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꿉니다.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처럼 들리는 대사들도 많아 개그 장면의 재미를 몇 배로 키웠습니다.
신파치 역의 사카구치 다이스케는 은혼 개그의 핵심인 딴지 대사를 쉴 새 없이 쏟아 냈습니다.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딴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실력은 은혼 특유의 리듬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카구라 역의 쿠기미야 리에는 귀여운 목소리와 거친 말투를 오가는 연기로 카구라만의 독특한 매력을 완성했습니다. 다만 개그 장면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패러디 대사가 많아 자막으로 볼 때는 따라가기 벅차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한 은혼 감상 팁과 장단점
은혼을 처음 보는 분이라면 1화부터 순서대로 보되 개그 에피소드가 맞지 않을 때는 장편 에피소드 위주로 먼저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홍앵편과 요시와라 염상편 그리고 장군 암살편과 낙양결전편을 따라가면 이 글에서 정리한 세계관의 흐름을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은혼의 가장 큰 장점은 웃음과 감동의 낙차입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개그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쌓이기 때문에 진지한 장면이 나오면 그 감동이 몇 배로 커집니다. 한 스승과 세 제자라는 단순한 이야기를 수백 화에 걸쳐 쌓아 올려 마지막에 완벽하게 거둬들인 구성도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분량이 매우 많아 입문 장벽이 높고 일본 대중문화를 알아야 웃을 수 있는 패러디가 많아 해외 시청자에게는 개그가 잘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결말 역시 연재 종료를 여러 번 번복한 끝에 극장판까지 이어지면서 흐름이 늘어졌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은혼만큼 웃기고 울리는 작품은 드물다고 말합니다. 은색 머리의 게으른 사무라이가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정리한 연표를 길잡이 삼아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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