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매드하우스가 쏘아 올린 스포츠 애니메이션의 금자탑과 시대를 초월한 명작의 탄생
2000년 10월 첫 방영을 시작한 더 파이팅(원제: 하지메노 잇포)은 당시 침체기였던 복싱 장르를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1989년부터 연재된 모리카와 조지의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제작 명가 매드하우스가 애니메이션화를 맡아 원작 특유의 거친 펜 터치와 타격감을 영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냈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방영 당시 고퀄리티의 작화와 제트기 엔진 소리를 연상케 하는 뎀프시롤의 효과음은 수많은 소년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실제로 복싱 체육관의 입관 문의가 폭주하는 사회적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치고받는 액션물을 넘어 한 소년의 성장 드라마와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사연을 깊이 있게 다루며 스포츠 애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감동의 최대치를 이끌어냈다고 평가받습니다. 방영된 지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최고의 스포츠 애니메이션을 꼽을 때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낚싯배 가게 아들 마쿠노우치 일보가 카모가와 짐의 문을 두드리기까지의 과정
이야기의 주인공 마쿠노우치 일보는 홀어머니와 함께 낚싯배 가게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착하고 성실한 고등학생입니다. 하지만 얌전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학교에서는 우메자와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 신세였습니다. 언제나처럼 구타를 당하고 낚시 지렁이 냄새가 난다는 모욕을 듣던 어느 날 로드워크를 하던 프로 복서 타카무라 마모루가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하고 일보를 구해줍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타카무라가 소속된 카모가와 복싱 짐에서 깨어난 일보는 그곳에서 샌드백을 치는 타카무라의 압도적인 강함에 매료됩니다. 타카무라는 분노를 샌드백에 풀어보라며 일보에게 잽을 가르쳐주는데 이때 일보는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엄청난 펀치력을 처음으로 자각하게 됩니다.
강해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복싱에 입문하기로 결심한 일보에게 타카무라는 나뭇잎 잡기라는 기상천외한 테스트를 제안합니다. 운동 신경이 전무해 보이던 일보는 피나는 노력 끝에 잽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 10개를 모두 잡아내는 데 성공하고 정식으로 카모가와 짐의 연습생이 됩니다. 그곳에서 일보는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 제자를 아끼는 카모가와 관장을 만나게 되고 평생의 라이벌이 될 미야타 이치로와 운명적인 스파링을 갖게 됩니다. 비록 스파링에서는 패배했지만 천재라 불리던 미야타를 다운시키는 기적을 보여준 일보는 본격적으로 프로 복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신인왕전부터 일본 챔피언 등극까지 이어지는 피와 땀의 대서사시 시즌 1
프로 테스트에 합격한 일보는 특유의 성실함과 파괴적인 펀치력을 앞세워 승승장구합니다. 특히 동일본 신인왕 결정전은 시즌 1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입니다. 일보는 결승전에서 미야타를 비겁한 방법으로 꺾고 올라온 사신 마시바 료와 맞붙게 됩니다. 긴 리치를 이용한 플리커 잽에 고전하지만 일보는 포기하지 않고 인파이팅으로 파고들어 마시바의 팔을 부러뜨릴 듯한 기세로 공격하여 역전 KO승을 거둡니다. 이후 전일본 신인왕전에서 서부의 강자 센도 타케시를 만나 난타전 끝에 승리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일보에게도 시련은 찾아옵니다. A급 토너먼트에서 베테랑 복서 다테 에이지에게 도전하지만 경험과 실력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며 생애 첫 패배를 맛봅니다. 이 패배는 일보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재기에 성공한 일보는 다테가 반납한 일본 페더급 챔피언 자리를 두고 라이벌 센도 타케시와 다시 한번 운명적인 대결을 펼칩니다. 믹스업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경기에서 일보는 필살기 뎀프시롤을 완성하여 센도의 맹공을 뚫고 승리 마침내 일본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시즌 1은 일보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며 소심했던 소년이 일본 최강의 사나이로 거듭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세계를 향한 도전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시즌 2 뉴 챌린저의 핵심 줄거리
2009년 방영된 시즌 2 뉴 챌린저는 일보의 방어전과 더불어 동료인 타카무라 마모루의 세계 타이틀 매치를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일보는 챔피언이 된 후 첫 방어전에서 사나다 카즈키라는 천재 의대생 복서를 상대로 고전하지만 뎀프시롤의 약점을 극복하며 방어에 성공합니다. 한편 일보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다테 에이지는 세계 챔피언 리카르도 마르티네스에게 재도전하지만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패배하고 은퇴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세계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일보에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시즌 2의 백미는 단연 타카무라 마모루와 브라이언 호크의 WBC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입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훈련을 게을리하고 상대를 모욕하는 호크와 그에 맞서 지옥 같은 감량을 견뎌낸 타카무라의 대결은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힙니다. 야성적인 본능으로 싸우는 호크에게 밀리던 타카무라는 관장님과의 훈련과 동료들의 응원을 떠올리며 각성하고 처절한 난타전 끝에 호크를 KO 시키며 세계 챔피언에 등극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복싱이 보여줄 수 있는 야성과 이성 그리고 노력의 승리를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주먹의 계보와 더욱 강력해진 적들이 등장하는 시즌 3 라이징
2013년 방영된 시즌 3 라이징은 원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전개 중 하나인 사와무라 류헤이와의 방어전을 다룹니다. 카운터의 명수인 사와무라는 일보의 뎀프시롤을 완벽하게 파해할 수 있는 천적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반칙과 광기로 얼룩진 사와무라의 복싱에 맞서 일보는 뎀프시롤의 진화형을 선보이며 승리하지만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또한 타카무라 마모루는 데이비드 이글이라는 모범적이고 강력한 챔피언을 상대로 2체급 석권에 도전합니다. 눈 부상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투혼을 발휘하여 승리하는 타카무라의 모습은 그가 왜 카모가와 짐의 기둥인지를 증명합니다.
시즌 3의 후반부는 전후 일본 복싱의 태동기를 다룬 카모가와 관장과 네코타 긴파치의 젊은 시절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미군 병사 앤더슨의 오만함에 맞서 일본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링에 올랐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주먹에 담긴 혼이 시대를 넘어 일보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카모가와 관장이 주먹이 부서져라 앤더슨의 복부에 철권을 꽂아 넣는 장면은 흑백 연출과 함께 비장미를 극대화하며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습니다.
진정한 강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애니메이션의 결말
※ 아래 내용에는 더 파이팅 애니메이션 시즌 3의 결말과 원작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작품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 바랍니다.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일보가 은퇴하거나 세계 챔피언이 되는 완결까지 다루지는 않습니다. 시즌 3 라이징의 마지막은 전후편 에피소드가 끝나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일보가 타카무라의 경기를 지켜보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타카무라는 이글을 꺾고 2체급 제패에 성공한 후 관장님에게 감사를 표하고 일보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었음을 깨닫습니다. 애니메이션은 비록 원작의 방대한 분량을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일보가 "강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링 위를 달릴 것이라는 열린 결말로 막을 내립니다.
하지만 원작 만화의 전개를 통해 우리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다. 일보는 이후로도 수차례 방어전을 치르며 세계 랭킹을 올리지만 펀치 드렁크 의심 증상과 신형 뎀프시롤의 완성 과정에서 겪은 데미지로 인해 결국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현재 원작에서는 일보가 세컨드(코치)로서 링 사이드에서 복싱을 바라보며 선수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깨닫고 다시 링으로 복귀할 조짐을 보이는 흥미로운 전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일보의 긴 여정 중 가장 빛나던 성장기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그가 겪은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아픔 그리고 동료들과의 유대감을 통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결말부에서 카모가와 관장이 일보의 등을 두드리며 미트를 받아주는 장면은 스승과 제자의 끈끈한 정을 보여주며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전설임을 암시합니다.
복싱 애니메이션의 교과서라 불리지만 길어진 연재가 남긴 현실적인 아쉬움
더 파이팅은 스포츠 애니메이션으로서 완벽에 가까운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격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사운드 디자인과 인물들의 근육 움직임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한 작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 경기장에 있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또한 단순히 주인공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볼그 센도 마시바 등 라이벌들의 서사에도 공을 들여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듯한 입체감을 가집니다. 특히 개그와 진지함을 오가는 완급 조절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소재를 유쾌하게 풀어내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단점 또한 존재합니다. 원작 만화의 연재가 30년 넘게 이어지면서 스토리가 지나치게 늘어지고 패턴이 반복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애니메이션 역시 시즌 3 이후 후속 시즌 제작이 지연되면서 팬들의 기다림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경기 연출에 있어서도 후반부로 갈수록 뎀프시롤 같은 필살기에 의존하거나 안면을 내주고 카운터를 치는 '맷집 싸움' 양상이 자주 등장하여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일보의 은퇴와 복귀 떡밥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시청자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기부터 3기까지 이어진 애니메이션 시리즈만큼은 군더더기 없는 전개와 폭발적인 연출로 복싱 애니메이션의 마스터피스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땀 냄새나는 사나이들의 우정과 열정을 느끼고 싶다면 더 파이팅은 인생에서 반드시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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