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세포라는 애니메이션은 이미 많은 분이 알고 계실 겁니다. 세포들이 귀엽게 의인화되어 우리 몸을 지키는 화이트한 직장 이야기였죠. 그런데 이번에 제가 정주행한 스핀오프 일하는 세포 블랙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같은 세포들이 등장하지만 이곳은 흡연 음주 스트레스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건강하지 못한 남성의 몸속입니다. 본편이 화이트 기업이라면 이곳은 말 그대로 블랙 기업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냥 세포들이 조금 더 고생하는 정도의 개그물일 거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봤는데 회차가 진행될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더군요. 오늘은 제가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소감을 솔직하게 정리해보려 합니다.
불량한 몸속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노동현장
일하는 세포 블랙의 주인공은 신참 적혈구 AA2153입니다. 그가 처음 배치받은 몸은 담배와 술을 끊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절어 사는 성인 남성의 몸입니다. 출근 첫날부터 동료 적혈구들이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좀비처럼 변해버리는 광경을 목격하는데 이 장면 하나로 이 작품이 본편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편에서는 병원체가 등장해도 큰 위기감 없이 밝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블랙에서는 매 화 누군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절박합니다. 콜레스테롤 때문에 울퉁불퉁해진 혈관 여기저기 낀 기름때 같은 노폐물들 그리고 부족한 인력으로 겨우겨우 버티는 백혈구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이 몸의 주인이 얼마나 자기 몸을 방치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개인적으로 요로결석과 신우신염을 다룬 에피소드를 볼 때는 저도 모르게 물을 챙겨 마시게 되더군요.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적혈구와 백혈구가 짊어진 무게 캐릭터와 성우진 이야기
주인공 적혈구 AA2153을 연기한 에노키 준야의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본편의 발랄한 적혈구와 달리 안경을 쓴 모범생 스타일로 등장하는 이 캐릭터는 극 중 내내 가장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인물인데 에노키 준야는 그 고뇌와 무력감을 담담하면서도 절절하게 표현해냅니다. 특히 동료를 잃고도 다음 배달을 나서야 하는 장면에서 억지로 감정을 추스르는 듯한 목소리 톤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여주인공 격인 백혈구 U-1196을 연기한 히카사 요코 역시 이 작품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본편의 단정한 백혈구와 달리 글래머러스하고 강인한 전사로 그려지는 이 캐릭터를 히카사 요코는 강단 있으면서도 그 안에 숨겨진 지친 기색을 함께 표현해내는데 겉으로는 씩씩해 보여도 속으로는 무너지기 직전인 인물이라는 게 목소리만으로도 느껴집니다. 두 성우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무게감이 이 작품을 단순한 패러디물이 아니라 진짜 드라마로 완성시킨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본편과는 다른 각오로 봐야 하는 작품
제가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의학적인 정확성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일하는 세포 시리즈 중에서도 블랙이 가장 고증이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보다 보면 병원체마다 대응하는 면역세포가 다르게 그려지는 등 디테일이 상당히 꼼꼼합니다. 여기에 노동 환경에 대한 은유가 상당히 시니컬해서 성인이라면 씁쓸한 공감을 느낄 대목이 많았습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본편에 비해 노출도와 폭력성이 급격히 올라가서 가벼운 마음으로 정주행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희망적인 전개가 거의 없다는 점도 호불호가 갈릴 부분입니다. 본편이 주는 산뜻한 위안을 기대하고 봤다가는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가볍게 힐링하고 싶은 사람보다는 현실적인 씁쓸함과 블랙 유머를 함께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훨씬 잘 맞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결말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부분은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놓지 않은 희망 한 조각 결말이 남긴 것
이야기 후반부로 갈수록 몸주인의 건강 상태는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결국 심각한 위기를 겪은 뒤 몸주인은 수술과 요양을 거치며 담배와 술을 끊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고생만 하던 세포들에게도 드디어 숨 돌릴 틈이 생기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는데 마지막화 쿠키 영상에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복하던 몸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수혈을 하게 되면서 주인공 적혈구와 백혈구의 일부가 두 번째 몸주인에게로 넘어가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몸주인 역시 이전 몸주인 못지않게 건강 상태가 엉망이라는 암시가 남으면서 결국 세포들의 고생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씁쓸하게 예고합니다. 완전한 해피엔딩도 완전한 절망도 아닌 이 애매한 여운이야말로 블랙이라는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볍게 보기 시작했다가 예상보다 훨씬 진지하게 몰입해버린 작품이었습니다. 본편의 발랄함을 기대한다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현실적인 은유와 탄탄한 연기를 즐기고 싶은 분이라면 꼭 한번 정주행해보시길 추천합니다. 다만 보고 나면 저처럼 담배와 야식을 한 번쯤 자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하는세포블랙 #CellsAtWorkCodeBlack #애니메이션추천 #에노키준야 #히카사요코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