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의 아이, 압도적인 영상미로 그려낸 생명의 탄생과 우주의 신비 그리고 여름날의 환상적인 기억

 


2020년 국내 개봉 당시 스튜디오 4도씨의 미친 작화력과 히사이시 조의 음악으로 관객을 압도했던 화제작

만화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해수의 아이'는 개봉 전부터 애니메이션 마니아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철근 콘크리트'와 같은 작품으로 독보적인 예술성을 인정받은 스튜디오 4도씨가 제작을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2019년 일본에서 먼저 공개되고 2020년 한국에서 개봉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마치 미술관에 걸린 명화를 그대로 움직이게 만든 듯한 수려한 작화와 거장 히사이시 조가 담당한 웅장한 사운드트랙 그리고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요네즈 켄시가 부른 주제곡 '바다의 유령'까지 더해져 눈과 귀가 호강하는 작품이라는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원작의 방대하고 철학적인 내용을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에 압축하다 보니 스토리가 난해하고 불친절하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습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스토리 라인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보여준 바다와 우주를 연결하는 시각적 연출만큼은 애니메이션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성취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이한 소녀 루카가 바다에서 온 두 소년을 만나 겪게 되는 이 신비로운 이야기는 단순한 성장물을 넘어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섭리를 탐구하는 거대한 서사시입니다.

핸드볼 소녀 루카의 우울한 여름방학 시작과 수족관에서의 운명적인 만남

이야기는 무더운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중학교의 핸드볼 경기장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 루카는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하고 열정적인 소녀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러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경기 도중 상대 팀 선수에게 거친 파울을 당해 넘어지지만 심판은 이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루카가 보복성 플레이를 했다며 퇴장 명령을 내립니다. 억울함과 분노를 참지 못한 루카는 결국 여름방학 첫날부터 동아리 활동 금지 처분을 받게 됩니다. 집에서도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소원해 갈 곳을 잃은 루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수족관으로 향합니다.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그곳에서 루카는 거대한 수조 안을 마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헤엄치는 한 소년을 목격하게 됩니다.

소년의 이름은 '우미'였습니다. 듀공의 손에서 자랐다는 우미는 물속이 육지보다 편안한 신비로운 아이였습니다. 루카는 우미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고 아버지는 루카에게 우미를 돌봐줄 것을 부탁합니다. 우미와 함께 바다를 구경하며 루카는 그동안 느꼈던 답답함을 조금씩 해소해 나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우미의 형인 '소라'가 등장합니다. 밝고 순수한 우미와 달리 소라는 어딘가 냉소적이고 병약해 보이는 미소년이었습니다. 소라 역시 바다에서 자란 아이였지만 우미보다 육지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루카와 우미 그리고 소라 이 세 명의 아이들은 바다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서로에게 이끌리며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전 세계 바다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과 소라가 루카에게 남긴 마지막 유산

아이들이 교감을 나누는 동안 바다에서는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세계 곳곳의 수족관에서 물고기들이 빛이 되어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혹등고래가 나타나 "축제의 손님이 온다"라는 알 수 없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해양학자들은 이것이 바다 생태계의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전조 증상임을 직감하고 그 중심에 우미와 소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두 소년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바다의 기억을 간직한 '해수의 아이'였으며 다가올 '탄생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존재들이었습니다.

소라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됩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루카를 불러냅니다. 소라는 루카에게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밤바다로 그녀를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소라는 바다로 떨어지는 유성을 쫓아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루카가 그 뒤를 따르자 소라는 바닷속에서 발견한 빛나는 운석을 자신의 입에 머금었다가 키스를 통해 루카의 입으로 건네줍니다. 소라는 "이걸 뱃속에 잘 보관해 줘"라는 말을 남기고 수많은 발광어 떼와 함께 빛이 되어 사라져 버립니다. 소라의 육체는 소멸했지만 그의 영혼 혹은 의지는 루카에게 전달된 운석과 함께 그녀의 안에 남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루카의 몸에서는 바다 생물들을 끌어들이는 신비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고 그녀는 자신이 소라를 대신해 '축제'의 게스트를 운반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 아래 내용에는 영화의 결말과 핵심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 바랍니다.

우주의 탄생을 재현하는 바다의 축제와 그 중심에 선 루카의 선택

소라가 사라진 후 우미는 큰 슬픔에 잠기지만 곧 시작될 '탄생제'를 위해 마음을 다잡습니다. 탄생제란 바다라는 거대한 자궁 속에서 생명의 씨앗인 운석(정자)을 받아들여 새로운 별 혹은 우주를 잉태하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루카는 자신의 몸속에 있는 운석을 전달하기 위해 우미와 함께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갑니다. 그곳에는 거대한 혹등고래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카와 우미는 고래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 안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환상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클라이맥스 부분은 영화의 백미이자 가장 난해한 부분입니다. 루카의 눈앞에는 우주의 빅뱅부터 생명의 진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물고기가 새가 되고 새가 다시 별이 되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루카는 자신 역시 이 거대한 우주의 일부임을 자각합니다. 루카는 자신의 뱃속에 품고 있던 운석을 꺼내 우미에게 건네줍니다. 우미는 그 운석을 받아들여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어 산화합니다. 이는 우미가 운석과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 혹은 별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루카는 눈앞에서 우미가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오열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영화는 "우리는 우주와 바다의 기억을 공유하는 하나 된 존재"라는 답을 제시합니다.

모든 의식이 끝나고 루카는 바다 위로 떠오릅니다. 거대한 축제는 끝났고 바다는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우미와 소라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루카는 그들이 파도 속에, 바람 속에, 그리고 자신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집으로 돌아온 루카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모습입니다. 어머니와의 관계도 회복하고 동생의 탄생을 지켜보며 생명의 신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루카가 여름날의 바다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모습은 그녀가 겪은 그 환상적인 체험이 꿈이 아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시각적 쾌감이 주는 전율과 불친절한 서사가 남기는 아쉬움의 공존

'해수의 아이'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시각적 아름다움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작품입니다. 바다의 물결 하나하나, 물고기들의 움직임, 그리고 우주와 심해가 교차하는 클라이맥스의 연출은 스크린을 압도하며 관객을 황홀경으로 몰아넣습니다. 특히 이가라시 다이스케 특유의 거칠면서도 섬세한 펜 터치를 영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낸 점은 기술적으로 극찬 받아 마땅합니다. 여기에 히사이시 조의 미니멀하면서도 웅장한 음악은 영상의 신비로움을 배가시키며 요네즈 켄시의 주제곡 '바다의 유령'은 영화의 여운을 길게 남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눈과 귀로 즐기는 예술 작품을 원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재미를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영화는 서사적인 개연성보다는 이미지와 상징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탄생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우미와 소라의 정체가 외계인인지 신인지, 운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관객의 해석에 맡기는 불친절한 태도는 스토리 중심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지루함과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캐릭터들의 대사 또한 시적이고 철학적이어서 한 번 듣고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야기가 아니라 체험을 하는 영화"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해수의 아이'는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작품입니다. 하지만 명확한 기승전결이 없더라도 압도적인 작화와 음악에 몸을 맡기고 바다와 우주의 신비를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는 인생 애니메이션이 될 수 있습니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청량함과 끈적함 그리고 밤바다의 서늘함을 동시에 느끼고 싶다면 루카와 함께 바다로 떠나는 이 여행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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