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거신 이데온이 보여준 천구백팔십년의 전율과 시대를 앞서간 시청자들의 반응
기동전사 건담의 대성공 직후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 곧바로 메가폰을 잡았던 전설거신 이데온은 천구백팔십년 일본 도쿄 12 채널을 통해 처음으로 방영되었습니다. 당시 완구 회사의 요청에 따라 다소 투박하고 전형적인 슈퍼로봇의 외형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내면에 담긴 이야기는 기존의 아동용 로봇물과는 궤를 달리하는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방영 초기에는 완구 디자인과 어울리지 않는 무겁고 난해한 전개 때문에 시청률 부진을 겪으며 조기 종영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알아본 마니아들의 열성적인 서명 운동과 재평가 요청에 힘입어 이후 극장판이 제작되는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오늘날 이 작품은 단순한 로봇 애니메이션을 넘어 인간 실존과 소통의 한계를 극도로 몰아붙인 SF 계의 기념비적인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비롯한 후대 수많은 서브컬처 작품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구인과 버프 클란의 비극적인 첫 만남과 솔로성에서 깨어난 무한력의 전설
이야기는 서기 이천삼백년대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여 외계 행성을 개척하던 시기에서 시작됩니다. 지구의 이민단이 이주하여 조사하던 솔로성이라는 행성에 또 다른 우주 고등 지성체인 버프 클란의 정찰대가 접근하게 됩니다. 버프 클란은 자신들의 전설에 나오는 무한한 에너지인 이데를 찾아 우주를 헤매던 중이었습니다. 두 문명은 서로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상태에서 극도의 경계심을 품고 마주하게 되며 사소한 오해와 돌발적인 총격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유혈 사태를 빚게 됩니다. 버프 클란의 압도적인 공격 앞에 지구 이민단이 전멸 위기에 처한 순간 유적지에서 발굴 중이던 거대 메카닉 이데온과 거대 우주선 솔로 쉽이 스스로 가동하기 시작합니다. 우연히 이 메카닉에 탑승하게 된 소년 유우키 코스모와 민간인들은 자신들이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생존을 위한 첫 방전을 시작합니다.
솔로 쉽의 끝없는 우주 도망극과 두 문명 사이에서 깊어지는 증오의 골
이데온의 강력한 힘으로 첫 위기를 모면한 지구인들은 솔로 쉽을 타고 솔로성을 탈출하여 끝없는 우주 방랑길에 오르게 됩니다. 버프 클란 군대는 이데온을 이데의 괴물이라 부르며 이 무한한 힘을 손에 넣거나 혹은 파괴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해 옵니다. 솔로 쉽 내부의 피난민들은 군인과 민간인의 경계가 무너진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매일같이 이어지는 전투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갑니다. 주인공 유우키 코스모는 뛰어난 조종 실력으로 전선의 선봉에 서서 동료들을 지키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버프 클란의 군세와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깊은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두 세력은 우주 공간에서 조우할 때마다 대화를 시도하거나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공포와 불신 그리고 먼저 공격당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번번이 협상에 실패하고 증오만을 키워나갑니다.
무한 에너지 이데의 발현과 전 우주를 파멸로 이끄는 압도적인 무기들의 등장
싸움이 거듭될수록 솔로 쉽과 이데온에 내재된 미지의 에너지인 이데는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탑승자들의 생존 본능과 공포심이 극에 달할 때마다 이데의 게이지가 상승하며 이데온은 점차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을 선보입니다. 행성 하나를 일격에 두 조각 내버리는 이데온 건과 수만 킬로미터 너머의 적들을 전멸시키는 이데온 스워드가 발동되면서 전장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우주적 재앙의 현장으로 변모합니다. 이에 맞서 버프 클란 역시 거대 기동병기와 행성 파괴용 미사일을 동원하여 솔로 쉽을 압박합니다. 지구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지구로 돌아가 도움을 요청하려 하지만 버프 클란을 끌고 왔다는 이유로 동족들에게마저 버림받으며 완전히 우주의 고아가 되어버립니다. 이데는 두 문명이 서로를 전멸시키려 하는 어리석은 행태를 지켜보며 이들의 자격을 시험하기 시작합니다.
(※ 아래 내용에는 전설거신 이데온 애니메이션 및 극장판 발도 카르디아의 최종 결말과 관련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인과 지평의 붕괴와 모든 생명이 종말을 맞이하는 마지막 전장
버프 클란은 총수 도바 아지바의 지휘 아래 전 군력을 집결하여 솔로 쉽을 포위하고 지구인들 역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직시하며 최후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전장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하며 유우키 코스모의 동료들과 솔로 쉽의 민간인들이 한 명씩 처참하게 목숨을 잃어갑니다. 어린아이들과 임산부마저 적의 총탄과 폭발 속에서 가차 없이 지워지는 극단적인 파멸의 연속 속에서 인간들의 증오는 극에 달합니다. 도바의 딸이자 코스모의 동료가 되었던 카라라 아지바 역시 친부의 군대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이는 두 세력 간의 마지막 이성마저 날려버리는 계기가 됩니다. 이데는 마침내 인간이라는 지성체에게서 더 이상의 소통과 진보의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리셋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데의 게이지가 맥시멈을 돌파하는 순간 이데온과 솔로 쉽 그리고 버프 클란의 거대 함대는 거대한 빛의 폭발과 함께 우주의 먼지로 화하며 인과 지평 너머로 사라져 버립니다. 두 문명뿐만 아니라 지구와 버프 클란의 모성까지 전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완전히 절멸하는 대파멸의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혼의 정화와 새로운 우주에서 다시 시작되는 소통의 가망성
모든 육체가 소멸한 이후 우주 공간에는 오직 순수한 영혼들만이 남게 됩니다. 살아서 그토록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려 했던 지구인들과 버프 클란 사람들의 영혼은 형태가 없는 빛의 무리가 되어 우주를 평화롭게 유영하기 시작합니다. 유우키 코스모와 그가 사랑했던 이들 그리고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적들의 영혼은 비로소 아무런 편견과 오해 없이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데의 의지는 이 정화된 영혼들을 모아 아직 생명이 태어나지 않은 새로운 태양계의 원시 행성으로 인도합니다. 먼저 떠났던 아기들의 영혼이 앞장서고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빛의 무리들이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며 카라라가 품었던 새 생명의 영혼이 메시아라는 이름으로 울려 퍼집니다. 육신의 한계와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파멸을 선택해야 했던 인류가 영혼의 상태에서나마 진정한 소통을 이루고 다음 세대에서는 다른 선택을 하기를 바라는 이데의 묵직한 염원을 보여주며 장엄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전설거신 이데온이 남긴 문학적 가치와 아쉬운 현실적 한계들
전설거신 이데온은 방대한 스케일의 우주 서사와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가차 없이 파고드는 서사적 구조 면에서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하는 작품입니다. 소통의 부재가 가져오는 비극을 이보다 극단적이고 설득력 있게 표현한 애니메이션은 찾아보기 힘들며 특히 후반부 극장판에서 보여준 파괴적인 연출과 예술적인 영상미는 시대를 고려하더라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그러나 고등학생 독자들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방영 초기 완구 판매용으로 급조된 이데온의 짐 형태 머리와 다소 유치해 보이는 붉은색 외형은 이야기의 무거운 분위기와 동떨어져 몰입을 방해하는 커다란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TV 판의 급작스러운 조기 종영으로 인해 후반부 전개가 극장판으로 밀려나면서 전체 이야기를 온전하게 감상하려면 여러 매체를 찾아보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존재합니다. 인물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보여주는 히스테릭한 반응과 가차 없는 몰살 전개는 대중적인 재미나 유쾌한 로봇물을 기대한 시청자들에게 심한 정신적 피로감과 불쾌감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도 명확한 단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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