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력 400으로 시작한 손오공이 왜 이렇게까지 강해졌을까요
드래곤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분명 처음에는 무술 대회에서 주먹을 겨루던 만화였는데 언제부터 행성이 부서지고 우주가 흔들리는 이야기가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지금은 파워 인플레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폭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워 인플레는 배틀 만화에서 진행될수록 등장인물이 대책 없이 강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힘과 팽창을 합친 일본식 조어이고 영미권에서는 파워 크립이나 파워 에스컬레이션이라고 부릅니다. 드래곤볼은 이 분야의 대명사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이 글에서는 드래곤볼 파워 인플레가 정확히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는지 단계별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숫자가 처음 등장한 순간부터 최종 결말까지 살펴보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됩니다.
전투력이라는 숫자가 등장한 순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큰 전환점은 스카우터와 전투력이라는 개념의 등장입니다. 사이어인 편에서 전투력은 처음 숫자로 표시되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드래곤볼은 무술 중심의 판타지 만화였는데 이 시기부터 우주를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 액션으로 바뀌었습니다.
전투력은 독자에게 새로운 적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한눈에 보여주는 편리한 장치였습니다. 매주 제한된 분량 안에서 변신이나 파워업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악당들이 힘을 일렬로 줄 세워 계산하는 방식은 손오공 일행의 추상적인 강함과도 대조되었습니다.
문제는 숫자라는 것이 한번 나오면 계속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한 번 숫자로 강함을 보여주면 다음 적은 그보다 커야 독자가 납득합니다. 독자는 숫자로 강함을 비교하는 재미를 알아버렸고 작가는 그 기대에 계속 응답해야 했습니다.
사이어인 편에서 프리저 편까지 불과 1년 사이에 폭발했습니다
수치로 보면 상황이 더 분명해집니다. 사이어인 편에서 프리저 편에 이르는 동안 손오공의 전투력은 기본 400에서 시작해 8000 이상과 9만과 300만을 거쳐 초사이어인 때는 1억 5000만으로 올라갑니다. 최종적으로 약 37만 5천 배가 상승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 모든 일이 작중 시간으로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벌어졌습니다.
사이어인 편 시점의 손오공은 전투력이 8000 정도였고 4배 계왕권을 쓰면 1만 6000에서 3만 2000 정도로 계산됩니다. 그런데 프리저 편의 문턱에서 기뉴 특전대의 2인자 기뉴가 12만이라는 수치로 등장하면서 스케일이 단숨에 달라집니다. 베지터가 3만 언저리였는데 특전대원이 그를 가지고 놀았다는 설정만 봐도 기준이 얼마나 빨리 바뀌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 안에서도 간극이 극심했습니다. 수백으로 시작한 수치가 같은 에피소드 안에서 3만을 넘고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1억을 오버하는 수준까지 올라갑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최고치를 찍었던 전투력이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싸움에 끼기도 어려운 수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특히 프리저가 문제로 자주 지적됩니다. 프리저의 기본 전투력은 53만인데 변신을 세 번 하고 나면 1억 2천만이 됩니다. 프리저 바로 앞까지 주인공 일행이 마주한 가장 강한 악당은 기뉴 특전대장이었고 그의 전투력은 12만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리저의 첫 형태가 그 4배가 넘는 53만이고 여기서 변신만으로 1억 2천만까지 뛰는 것입니다. 한 평론은 프리저의 기본 수치를 20만이나 15만 정도로 낮췄어도 충분히 이야기가 성립했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초사이어인이 들어오면서 배수 개념이 판을 뒤집었습니다
파워 인플레를 결정적으로 키운 것은 배수 개념입니다. 계왕권은 몇 배라는 식으로 힘을 곱해서 쓰는 기술이었고 여기서 이미 수치가 크게 뛰었습니다. 해외 팬 포럼에서는 손오공이 계왕에게 수련받고 돌아온 뒤 전투력이 5000이 된 시점부터 수치 관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여기에 초사이어인이 등장합니다. 공식 자료를 분석한 팬 사이트에 따르면 손오공이 20배 계왕권으로도 프리저를 이기지 못하다가 초사이어인이 되어서야 이겼으므로 초사이어인은 평상시의 40배가 넘는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대전집이라는 공식 설정집에도 초사이어인이 50배의 힘을 준다는 설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가 더 재미있습니다. 대전집은 프리저 이후의 강함은 전투력으로 잴 수 없다고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프리저 편이 끝난 뒤에는 스카우터로 밝혀진 전투력이 미래의 트랭크스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작가가 수치 체계를 스스로 내려놓은 셈입니다. 수치를 그대로 믿고 파워 인플레 이후의 싸움을 묘사하면 서로 한 번씩만 공격을 주고받아도 지구가 사라져 우주 공간에서 싸워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 해외 매체는 프리저를 쓰던 시점에 작가가 이 시리즈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 알지 못했다는 점도 배경으로 짚었습니다.
조연들이 뒤처지자 수련으로 무리하게 따라가게 만들었습니다
파워 인플레가 커질수록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초기부터 함께한 인물들이 점점 구경꾼이 되어간 것입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원조 조연들이 치솟는 수치와 사이어인의 기세에 밀려 오공 일행의 싸움을 지켜보며 감탄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정리합니다.
이를 보완하려고 조연들에게도 큰 파워업을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무리수가 생겼습니다. 크리링처럼 최장로에게서 잠재능력을 끌어낸 경우는 편법이라도 납득이 갔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수련만으로도 엄청난 파워업을 하는 경우가 나오면서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조연을 파워 밸런스에 맞추려다 생긴 부작용이라는 평가입니다.
프리저 편 이후에는 베지터가 확고한 2인자 자리를 차지하면서 지구인 조연들이 밸런스를 따라갈 필요가 줄었고 이 문제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주요 싸움에서 점점 밀려났습니다. 배틀 만화에서는 싸움이 최우선이라 낙오된 캐릭터는 위치가 애매해지고 출연 횟수와 인기가 줄어들기 쉽습니다. 팬들 사이에서 야무치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렇다고 이런 캐릭터를 구제하려고 갑자기 인플레를 따라가게 만들면 이번에는 독자가 불합리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 딜레마가 파워 인플레가 남긴 대표적인 상처입니다.
마인 부우 편에서 결국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요
지금부터는 원작 결말 내용이 나오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이후 인조인간 편과 마인 부우 편으로 가면서 인플레는 더 치솟습니다. 마인 부우 편에서는 고텐크스가 초사이어인 3까지 변신하고 손오공과 베지터가 퓨전으로 벨지트를 만듭니다. 부우는 사람들을 흡수해 강해지는 슈퍼 부우가 되고 마지막에는 가장 파괴적인 형태인 어린 부우로 돌아옵니다.
최종 결전에서 지구는 파괴되고 인류는 전멸하지만 나메크성 드래곤볼로 모두 되살아납니다. 손오공은 되살아난 세상 모든 생명체의 힘을 모은 초원기옥으로 어린 부우를 소멸시킵니다. 그런데 이 초원기옥마저 부우가 붙잡아 손오공 쪽으로 되돌려 밀어내는 위기가 있었고 데데의 소원으로 손오공의 힘을 회복시켜서야 겨우 승리합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장면 뒤에 더 많은 인물이 힘을 보태는 연출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원작은 이후 1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마무리됩니다. 지구가 파괴되고 되살아날 정도로 커진 스케일과 달리 마지막은 평화로운 세상으로 돌아오는 방식이었습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무엇이 잘못이었고 무엇은 어쩔 수 없었을까요
먼저 이해할 점부터 짚어보겠습니다. 드래곤볼은 주간 연재 만화였고 매주 독자를 사로잡아야 하는 구조 안에서 그려졌습니다. 전투력과 변신은 그 압박 속에서 독자에게 강함을 빠르게 전달하는 효과적인 도구였습니다. 프리저의 변신도 즉흥적으로 추가된 부분이 있다는 분석이 있어서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인플레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초반에 이미 너무 높은 기준을 만들었고 초사이어인의 배수가 지나치게 커서 이후 모든 악당이 그 위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작가가 전투력 체계를 사실상 포기했음에도 이후 모든 이야기는 그 숫자가 만든 기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또 이런 강함의 경쟁은 이후 드래곤볼 슈퍼에서도 이어져서 한 해외 매체는 힘의 대회에서 카울리플라가 초사이어인 2로 손오공과 대등하게 싸우고 케프라가 부우 편의 벨지트보다 강해 보이는 것을 두고 파워 스케일이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정리하면 드래곤볼 파워 인플레가 꼬인 지점은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전투력이라는 숫자를 도입한 뒤 배수 개념과 초사이어인이 겹치며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과정 전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폭주 덕분에 드래곤볼이 수많은 배틀 만화의 원형이 되었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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